이름 : 변영훈
기수 : 드래곤즈 21기
소속 : 드래곤즈OB
전공 : 경성대학교 전기전자컴퓨터공학과
Q1. 드래곤즈 입부동기가 궁금합니다.
1학년 신입생 모집기간 때, 학교 마치고 내려가고 있었다. 내려가는 길에 동기 훈식이하고 주장이었던 동흠이 형님이 붉은 광장에 계셨다.
그때 동기 훈식이가 내가 내려가는 거 보고 ‘어? 저기 내 친구다’라고 말해서 동흠이 형님이 오라고 하셨다. ‘일로 와봐라.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겠네, 오늘 운동되나? 어디 학과고?’ 물어보길래 ‘전기전자 컴퓨터공학과입니다.’라고 했더니 ‘거기에 큰 형님 두 분 계신다.’ 하셨다. 박세훈형님, 정시환형님이었다.
그렇게 해서 바로 다음 날에 운동장에 올라갔다. 너무 힘들었다. 고등학교 농구부 서클을 했었는데 그때보다 더 힘들었다. 그만두려 했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학과에 큰 형님 두 분이 계시기 때문에(웃음).
Q2. 미식축구를 ‘계속 해야겠다’라고 마음먹은 결정적 순간은?
14기 형들이 다 졸업하고 15기 형님이 왕고였다. 그때 15기 시환이 형님은 왕고이면서 같은 리시버였다. 같은 학과에 대선배이면서 리시버 직속선배였다. 그래서 동아리를 나갈 수 없었다. 학교 등교만 하면 마주칠 수 밖에 없기 때문에(웃음).
미식축구하면 합숙이나 시합할 때 사점이 오는 경우가 많다. 사점을 극복했을 때 내가 많이 성장했다고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친형이 2명이 있는데 드래곤즈 형들이 친형처럼 잘 챙겨주기도 했다. 그 때 20기 매니저 누나들도 잘 챙겨줬다. 집 가는 방향이 같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부실에서 점심 때 앉아있으면 밥 사주고, 운동 마치면 술 사주고, 옆에서 카드치고 있는 거 구경하다가 한 명이 많이 따면 얻어먹고 그랬다. 그 추억 때문에 미식축구에 계속 남아있는 것 같다.
Q3. ‘그만 둬야겠다’라고 생각한 순간은?
39기 우진이가 전에 노래 불렀을 때, ‘블락킹할 때마다 아프다’ 이런 가사가 있었다. 1학년 들어가자마자 바로 블락킹을 했었다. 14기 형들이랑 했는데 1학년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가거나 극복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내 동기들도 100명 들어왔는데 3~4명 남았다. 그리고 시합이 2월까지 있었다. 연습하면 춥고 블락킹하면 아프고 그랬다. 전국대회 준비하면서 연습인원이 1명이라도 빠지면 주장행님께 나온 사람 모두가 빠따를 맞았다. 다 같이 맞아서 덜 억울했던거 같다.
이건 여담이지만 어릴 때 높이뛰기를 했었다. 동흠이 형님이랑 개인 블락하다가 한번 얼떨결에 뛰어넘어버렸다. 블락하면 원래 낮게 날아오기 때문에 쉽게 뛰어 넘을 수 있었다. 그때 박감독님이 ‘1학년도 못 막나’라고 동흠이형님한테 말하고 형님이 오기가 생겨서 다음 태클하는데 정말 세게 박혔다. 나는 그때 당황해서 뛰어넘긴 했지만 너무 세게 박혀서 아팠다.
Q4. ‘미식축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18기 이대승'형님이 제일 생각난다. 처음 형님을 본 기억은 형님이 해병대 휴가를 나오셔서 동아리에 오셨다. 대승형님 키가 190이고 내가 형님보다 2cm 더 컸는데 보자마자 하신 한 마디가 ‘내가 18기 이대승이다. 너희는 나를 이겨야한다’ 이러는 거 아닌가?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근데 나는 그때 취해서 ‘당연하죠!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술 먹다가 갑자기 장비를 입을 수 없으니깐 농구 내기를 하러 갔다. 그때 중앙도서관 앞에 농구코트가 있었고 장대비가 엄청 쏟아지고 있었다. 1:1로 5점 내기를 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옷이 다 젖었다... 나중엔 둘 다 다 벗고 팬티만 입고 농구를 했다.
결국 내가 졌다. 대승이 형님은 정식 농구서클에서 했던 사람이었고 나는 이제 막 생긴 신생팀에서 했었기 때문에 질 수 밖에 없었던 시합이었다. 그 이후로 대승이 형님이 제대하고 같이 운동을 하면서 졸업 때까지 한 번도 대승이형님을 블락으로 밀어서 이겨본 적이 없다. 대승이형님은 ‘끝까지 밀어라’하면서 밀었지만 나는 뒤로 자빠지고 그랬다. 나중에는 너무 애를 써서 코피까지 났다. 그러고 대승이형님이 끝나고 한 마디 했다. ‘다칠까봐 살살했다’. 그 정도로 월등했었다.
Q5. 미식축구하면서 ‘이것은 정말 자신 있었다’라고 생각하는 나만의 필살기는?
엉뚱할 수 있겠지만 빨래하고 청소는 잘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매일 운동복을 빨아입었다. 내가 주장했을 때 세탁기가 있었는데 그때 밖에 누가 안 빨아놓은 게 있으면 그것까지 모아서 빨았다. 항상 부실이 깨끗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밀대로 부실바닥 다 닦아놓고 그랬다. 약간 결벽증도 있고 그래서(웃음). ‘부실에 냄새가 안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다른 에피소드로 하나는 1학년 전국대회 나갈 때 MBC에서 ‘사람과 사람들’ 촬영이 왔었다. 그때 부실을 촬영하러 왔는데 시환형님이(18기 이시환) 겨울에 땀나고 굳어서 얼은 양말을 보여주는데 양말이 과자처럼 부숴졌다. 그만큼 형님들이 빨래를 안했다. 그래서 더욱 빨래랑 청소를 더 열심히 한 것 같다.
Q6.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2006년도 일본팀과 시합이 있었다. 9박 10일로 일본 가서 8일 운동하고 하루 관광하고 돌아왔었다. 그때 박창훈 감독님이 어머니 모시고 함께 오셨다.
시합 당일 날 킥오프리턴 리터너로 들어갔다. 오른쪽에 동의대 김수돈 선수가 서있고 나는 왼쪽에 서있었다. 그런데 계속 일본팀이 공을 오른쪽으로 찼다. 내가 리드해주러 가고 있었는데 수돈이가 공을 놓쳐 내가 공을 잡고 뒤로 돌아서자마자 박혀버렸다. 50야드 이상 전력질주 하던 상대팀이랑 박히고 자리에 누워있었는데 몸이 마비 되서 안 움직여졌다. 그렇게 세게 박힌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벤치로 나와 있었는데 페이스마스크가 박살나있었다. 그것도 처음 겪어본 일이었다.
페이스마스크 부서지면서 눈에 부딪혔는지 눈이 점점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눈도 붓고 페이스 마스크도 박살나서 쉬어야하는데 밖에 박창훈감독님이랑 박창훈감독님 어머니가 오셔서 보고 계신다는 게 생각이 났다. 그래서 그때 경북대 홍동혁 코치님이 페이스 마스크를 새로 갈아주시고 다시 시합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서 외국팀이랑 처음 경기해봤고 사점을 넘어서 ‘진짜 내가 죽겠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시합 다 뛰고 졌지만 최우수선수상을 내가 받았다. 이건 내가 잘해서 기억에 남는 것 보다 YB 시절 외국팀과 경기하는 모습을 보러 와주신 박감독님과 박감독님 어머님께 좋은 경기를 보여주고 싶어 하던 내 자신이 더 기억이 남는 것 같다.
Q7. 인생에서 가장 잊고 싶은 순간은 언제인가요?
미식축구 월드컵에서 국가대표 감독님이 킥 리턴 리터너로 변영훈을 꼭 써야 한다고 했었는데 내가 안 갔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경마장 다닌다고 정신이 팔려서) 연습도 안가고 그랬다. 내가 신입생부터 한 번도 연습을 빠진 적이 없었는데 3일이나 안 나갔다. 모든 걸 못했던 그런 시기였다.
그러다 결국 학교를 자퇴했다. 국가대표에서는 안 오냐고 연락이 엄청 왔었다. 그래서 한 번 올라간 적이 있는데 운동장에 들어서자마자 남자매니저 한 분이 지금 오시면 안 된다고 그랬다. 그래서 다시 내려가고 있었다. 내려가는 길에 노인환 회장님을 만났다. 나를 나무라지 않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괜찮다고 위로해 주셨다. 나를 믿고 기다리던 감독님, 회장님, 함께 연습했던 모든 선수들에게 부끄러웠다
Q8-1 YB 때로 돌아가신다면 어떻게 매니저를 챙겨주실 거 같나요?
시합 끝나면 고생했다고 얘기를 많이 해줄 거 같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있는 거라고. 그땐 아예 관심을 안 가졌다. 나 잘난 맛에 하는 거다. 막 기고만장해서 아무도 안 보인다. 그 당시에는 주변을 잘못 보살핀 거 같다. 매니저 없으면 선수가 그만큼 모이겠나?(웃음)
Q9. YB들에게 전해줄 ‘알고 보니 쓸모없고 비효율적인 것’ 2가지만 꼽자면?
나는 전기·전자공학과를 가고 싶은 게 아니고 들어올 때 성적에 맞춰서 들어왔다. 대학 1학년 때에는 보통 친구들 듣는 수업을 같이 들으니까 친구들 따라 들었다. 근데 제대를 하고 오니까 친구들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듣고 싶었던 수학과 수업들로 전부 들었다. 나는 수학이 너무 재밌으니까... 지금 YB들도 그냥 다들 친구들이 듣는 수업을 들을 텐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그냥 내가 듣고 싶고 배우고 싶은걸 듣는 게 좋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두 번째로는 너무 여러 군데에 몸담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다. 예를 들면 과 생활도 하고 동아리도 여러 개하고 친구들이랑 피시방도 가야하고 술도 먹고 이렇게 많은 걸 할 필요는 없고 한군데만 집중해도 될 거 같다.
나도 한때 6~7개를 동시에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결국은 다 포기를 하게 되더라. 그 당시에 나도 하나에만 집중하는 게 좋았을 것 같다. 그리고 만약 하나만 했으면 어떤 거냐 하면 미식축구다. 왜냐하면, 20대는 친구를 얻고 잃는 걸 힘들어한다. 그런데 결국 세월이 지나면서 다 떨어져 나가거든. 남는 사람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그런데 미식축구는 다르다. 40년 이상 동안 유지되는 이유가 있다. 충분히 드래곤즈만 해도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한다. 다른 데서 배울게 없다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역사도 길고 성공한 형님들도 많고 육체적으로도 뭔가를 느낄 수 있다.
Q10. 앞으로 10년 후에 미식축구부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드래곤즈 21기로 1학년에 들어왔을 때 1기 형님을 봤을 땐 좀 가깝게 느껴졌다. 그런데 41기가 들어오니까 1기 형님과 느낌은 엄청 멀다고 느꼈다. 사실 1기랑 41기가 만나서 대화를 하고 이런 게 쉽진 않다. 그런데 SNS나 책으로 통해서는 훨씬 서로에 대해 알기가 쉬우니까 좋은 거 같다. 월간 용광로에는 그분들의 인터뷰를 실을 수 있으니까 나중에 100년 뒤에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용광로가 나이를 넘나들어서 연결을 지어준다고 생각한다. 이런 역사를 이어줄 수 있는 매개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학교가 이걸 하고 있으므로 우리 학교는 계속해서 우상향 할 것으로 생각한다.(웃음)
그리고 또 하나는 미식축구의 인지도를 넓히면 좋을 것 같다. 시합하고 오면 마을 사람들이 알아보고 박수를 쳐주기도 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미식축구를 했다고 하면 취직할 때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으니까. 사실 미식축구를 한사람이라면 육체적으로도 힘든 걸 다 겪어낸 사람이고 팀 운동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 극복한 사람이다. 미식축구가 인지도가 높아져서 기업들이 미식축구를 한 졸업생들을 우선순위로 넣어줄 수 있게 되면 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더 많아지지 않을까?
Q11.‘월간 용광로’에 대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내가 그냥 승배랑 현민이랑 달리기했을 때 ‘책자를 만들고 싶다.’ 이랬는데 진짜로 현민이가 이렇게 월간 용광로를 컬러로 업그레이드 시켜서 만들지 전혀 몰랐다. 언제까지 월간 용광로가 나올진 모르지만, 이 좋은 시스템을 오랫동안 유지되게 했으면 좋겠고 42기, 43기도 배울 수 있으면 좋겠고 항상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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