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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특별한 만남

고려대 미식축구부 타이거즈 석진우 前감독 특집 2020.03

by HUEMONEY 2020. 4. 14.

2020년 3월 11일에 드래곤즈 코치진은 고려대학교 미식축구부 타이거즈 감독을 역임하신 석진우 감독님을 만나고 왔다. 고려대학교에서 8년 간의 감독생활, 지금은 미식축구 중계방송까지.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공식 질문입니다. 미식축구부 입부 계기가 무엇인가요?
월간 용광로를 위한 소설 아니냐고 할텐데... 실은 제가 살던 집이 바로 경성대학교 캠퍼스 바로 앞이었습니다. 태어나서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던 곳이 바로 경성대 법정대학 밑에 있는 주택가였고 고등학교 때 경성대 미식축구부를 처음 보았습니다. 주말에 목욕탕에 가면 호수탕이었나? 목욕탕에 십여명이 들어오던 경성대 당시 80년대 학번 선배들도 보았죠. 어머니께서는 우리집을 개조해서 국밥집을 운영하셨는데 식당 이름이 용연코너였고 경성대 미식축구부 선배들 중 단골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미식축구는 경성대 미식축구부 그리고 AFKN을 보면서 접했습니다. 대학교 들어가서는 1학년 때 신체검사 하는 날 85학번 주장형님에게 찍혀서 그냥 입학하자마자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미식축구부에 완전히 빠지게 된 그 시점은 언제일까요?
입부하고 나서는 항상 그만둘 생각과 멋지게 태클해서 상대를 제압한 느낌 사이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왔다갔다 마음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복학 후에도 힘들었습니다. 운동보다 서울협회가 둘로 갈라져서 협회와 연맹체제가 되었으니까요. 94년에 미국으로 무작정 유학을 갔습니다. 펜실바니아 대학교인데 (아이비리그 중 하나로 원래 와튼스쿨이라고 MBA로 가장 유명) NFL에 라인맨들을 가끔 배출하는 미식축구로도 제법 유명한 학교죠. 제가 살던 숙소 같은 층에 사는 녀석이 펜실바니아 대학교 DE였습니다. 나도 한국에서 미식축구 했다고 하니까 그 친구와 친해져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연습도 하고 정말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았습니다. 뭐랄까 헤어진 애인을 다시 만나서 새롭게 연애하는 그런 느낌? 그러다 보니 친해지고 그 친구가 나를 가르쳐주고 티켓도 줘서 보러 가고 그랬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식축구가 또 재밌어지더라고 이게 인연이지. 아직도 연락해요.

고려대학교 감독직을 맡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예전에 고려대에서는 합숙하기 전에 선배들한테 찾아가서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해서 가면 선배들이 밥도 사주고 봉투도 줍니다. 그걸 모아가지고 합숙비로 쓰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후배들이 합숙 전에 온다길래 밥 사주려고 만났어요. 신나게 놀다가 내가 ‘요즘 와이비는 어떻노?’ 애들이 갑자기 다 다운되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 해 춘계 전패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내가 자존심도 상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알고 보니 애들은 감독도 없고 나 때는 그래도 감독님도 계시고 외국인코치도 있었는데 엄청 미안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합숙 때 휴가를 내서 조금 가르쳐줄게'라고 했어요. 감독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하여튼 그래서 애들 모아서 어디까지 아는지 물어본거죠. 근데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가장 기초적인 것도 잘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날 abcd부터 알려줬어요. 그러고 나는 ‘되쓰 이제 끝났다’하고 갔어요. 

근데 그 해 가을 시합 때 되니까 주장한테 전화가 왔어요. ‘이번 주말에 시합이 있는데…. 벤치에 계셔만 주셔도 영광입니다’ 이러는 거야 그래서 나는 시즌 때 다 벤치에 있으면서 소리 엄청 질렀지. 근데 애들은 내가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고 나도 애들에 대해서 모르니까 얘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모르고 알 수가 있나 그렇게 그해 2승 정도 했어요. 그러고 애들이랑 마지막 날 회식하면서 술에 취했는데 ‘그래 내가 감독할게’ 이런 거죠. 그렇게 시작해서 몇 년을 감독했어요.

선수였을 때의 미식축구, 감독으로서의 미식축구는 어떻게 다른가요?
간단히말하면 선수 때는 이기면 내가잘해서 이긴 거고, 감독일때는 내가 못해서 진 것 같죠... 시야가 달라요. 선수 때는 시합 끝나면 내가 잘하면 와~ 뿌듯하고 태클 잘했다고 하면 기분 좋아서 막 크으~ 그러는데, 감독일 때는 시합 끝나면 내가 왜 저 때 저걸 썼을까 계속 그 생각을 해요. 나는 10점 차 이하 경기는 무조건 감독 책임이라 생각해요. 조금만 더 운영을 잘하고 생각했다면 그 정도는 뒤집을 수 있다고 봐요.

감독 부임 이후 가장 어렵다고 느낀 점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가정과 직장 이 두 가지가 미식축구와 끊임없이 부딪히는게 가장 어려워요. 한국에서는 대부분 가정하고 감독을 같이 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감독한다 하면 무조건 잘해야 하잖아요. 가족들이랑 놀다가 남는 시간에 감독 하러 가는 건 취미잖아요. 하려면 무조건 잘해야 하니까 가정이랑 감독이랑 같이 잘하려고 무지 노력했어요. 

 그리고 두 번째로 힘들었던 건 선수들의 큰 부상이랑 진로에 대해서 모색을 못 해서 취준생으로 남아있을 때인데 
부상은 내가 별의별 방법을 동원해서 해봤었어요. 특히 게을러서 테이핑 잘 안 하고 오는 애들은 그러면 내가 다시 신발 양말 벗기고 전부 테이핑을 시켰어요. 그래도 다쳐요. 또 힘든 부분 중 한 가지인 진로에 대한 부분은…나는 감독일 뿐이지만 후배들이니까 다 잘 지냈으면 좋겠는데 한 명이라도 안 좋게 되면 ‘미식축구를 안 했으면 더 잘 풀렸으려나?’라는 생각도 하지요. 물론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이 가끔 들어요.

오랜 기간 고려대에서 감독직을 역임하셨습니다. 후회되는 순간들, 좋았던 순간들이 궁금합니다.
후회는 없어요. 그때 잘했다는 게 아니라 그 당시 그 상황에서는 모든 걸 다했어요. 운동장 골대 옆에서 운동을 합니다. 운동장이 좁아서 복창 터졌죠. 운동장이 좁으니 패스 연습, 킥오프 연습을 제대로 못했어요. 학교에 요청하고 행정부도 찾아가서 맨날 싸웠어요. 결국 운동장이 제일 아쉬웠죠. 야구부 축구부는 이런 걱정을 안 해요. 미식축구부라서 첫 번째가 운동장 두 번째가 학교측의 지원. 다른 학교 축구, 야구, 농구, 배구는 예산이 억대로 돌아가지만 비인기 스포츠인 만큼 학교에서 그만큼 예산을 안잡아줘서 아쉬울 뿐이죠.

감독으로서 팀을 위해 선수-매니저들에게 어떤 노력들을 해보셨나요?
감독으로서 혼자 했던 건 아니었고, 감독 첫 해에는 우선그만두는 선수들의 진짜 속마음을 알고 싶어서 여러가지시도를 했었습니다. 진짜 이유를 알아야 개선을 하고, 개선을 해야 선수층이 두터워져서 선순환이 될테니까요. 그래서 전화를 하기도 하고 직접 부탁해서 만나기도하고 그랬어요. 또 하나는 부모님에게 직접 편지를 썼습니다. 부모님이 가장 걱정하시는 3가지가 있습니다. '성적, 부상, 진로'입니다. 미식축구부 때문에 이 3가지를 걱정하지 않으시도록 편지에 그에 맞는 내용을 적어 보낸거죠. 예를 들면 "미식축구 때문에 성적이 안나왔다는 말이 안나오도록 성적 관리는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성적이 안나오면 경기를 못 뛰도록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했구요.

미식축구중계방송과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처음 중계방송을 하신 이유 그리고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내가 방송국 장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예전에 시애틀이 슈퍼볼을 나간 시즌에 약 2~3년 정도를 SBS 스포츠, 골프 채널이 슈퍼볼 중계권을 받았어요. 근데 해설가가 없어서 나에게 중계를 해달라고 연락이 와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녹화방송을 했어요. 월요일 저녁에 녹화를 하고 화요일 저녁에 방영되었죠. 

그런데 요즘에는 인터넷이 많이 발달해서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경기를 봐도 재미가 없는거에요. 그래서 몇 안 되는 시청자들이 ‘라이브 해라’ 라고 해서 방송국에서 라이브를 결정했죠. 결국 월요일 새벽 3시에 라이브를 하려고 새벽 1시부터 준비를 해서 1시에 방송국 도착, 메이크업 받고 2시에 아나운서랑 맞춰보고 3시부터 5시에서 5시 반까지 방송을 하는데... 이걸 2년 동안 했어요. 하지만 그 뒤에는 이런 기회는 없었어요. 

그러다가 재작년 2018년에 양산 서창운동장에서 사회인팀 경기가 있었어요. 사회인 팀에 후배가 있어서 보러 갈 겸 갔다가 그때 YB시절 같이 시합했던 연세대 선배가 갑자기 ‘어 잘 왔다~ 여기 와서 중계해라’ 라고 하시는거에요. 가보니 인터넷 중계방송이었어요. 막상 마이크를 잡으니깐 선수 정보도 모르고 어떤 팀인지도 모르겠고 메모지는 들어오고 난리가 났죠. 그렇게 열심히 하고 이제 집을 도착했을때 연락이 왔어요. ‘인터넷에 반응이 좋더라, 다음 주에 대구에 온나’ 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때부터 다시 방송이 시작되었어요..

그 전에도 많은 미식축구인들이 아프리카 TV로도 시도를 했었고 여러 가지 방면으로 시도를 했었어요. 매년 협회에서는 ‘방송국에서 중계를 하겠다’ 하지만 현재까지 연속성을 가지고 실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나는 ‘차라리 인터넷으로 하면 되겠다’라고 생각을 한거죠.

혹시나 미식축구 경기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직
은 비인기 운동이기 때문에 전략 분석 쪽으로 하는 것 보다 첫 번째로는 미식축구가 얼마나 멋있는 경기인지 알려주고 싶고, 두 번째로는 나이가 들면서 필드 위에서 공을 들고뛰는 선수들이 너무 예뻐 보여요. 그래서 비난이나 비판보다 칭찬을 해주고 싶었어요. 예를 들면 오펜스가 -5yd가 되더라도 ‘디펜스가 기가 막히게 잘했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거죠. 그래서 작년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신거 같아요. 앞으로도 방송 기회가 있으면 똑같이 할 겁니다. 물론 나도 사람인데 왜 호불호가 없겠어요. 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꾹꾹 누르고 진행했어요. (웃음)

작년 2019년에 협회에서 방송제재가 있었는데요?
엄밀하게 말하면 2019년은 방송제재라기 보다는 방송중계와 관련한 협의가 안되어 중계권을 AFKN이 받지 못하고 협회에서 직접 진행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현재의 협회의 주장은 모든 미식축구 관련 업무를 KAFA의 틀 안에서 진행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입장차이가 크고 세부적인 사항이 워낙 복잡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내에 정리해서 말씀드리기는 힘들 것 같고요..

 

AFKN은 연세대 한재익 선배님이 먼저 만들었고 현장에서 엔지니어는 한재익 선배가, 해설은 제가 하고 카매라맨은 캠코더 한번이라도 만져봤던 OB를 현장에서 구했어요. 카메라맨은 항상 현장에서 구했습니다. (웃음) AFKN은 미약하게 시작하는 일종의 자원봉사단체처럼 운영하고 있지만 최소한의 방송 자율성을 보장받고 싶었고, 협회는 협회의 틀 안에서 진행하기를 원했죠. 결국에는 방송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실망했던 많은 미식축구인들로부터 연락을 많이 받았습니다. 작년에 협회에서 직접 방송을 제작한 이유입니다.

어쨌든 2020년은 AFKN의 대학리그 중계는 어려운 상황이구요. 이벤트•친선 경기 등은 요청받으면 방송 가능합니다. 올해는 사회인리그 중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석진우에게 미식축구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깊은 고민) 어떻게 변했을지 몰라서 만나고 싶지만 만나고 싶지 않은 첫사랑 같은 그런 느낌? 애증이 있어요.  "아씨 내가 미식축구를 안 했으면 더 잘 나갔을까?" 아니면 "내가 미식축구가 아니었으면 추억도 없고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공존합니다. 그래도 미식축구는 나에게 좋은 기억이 훨씬 더 많아요.

월간용광로에 대해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나는 어떠한 시도든지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거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하지마세요. 나는 이 잡지를 만든다는 시도가 정말 정말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경성대 선수들은 잘 모르지만 나는 어떻게 보면 예전에는 전투적으로 치열하게 미식축구를 했던 경성대였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유연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욱 더 긍정적인 의미로써 위협적이야. 나는 경성대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어요. 이런 여러 가지 이벤트, 과거 선배들과 중간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잡지도 유지된다고 생각해요. 월간용광로가 너무너무 좋다고 생각해요. 오늘 이렇게 '블락 1호'를 받은 것도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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