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터뷰/드래곤즈 인터뷰

드래곤즈 15기 정시환 2020.05

by HUEMONEY 2020. 7. 13.

이름 : 정시환
기수 : 드래곤즈 15기
별명 : M
전공 : 경성대학교 컴퓨터공학과

Q1. 조금 옛날로 돌아가서요. 드래곤즈 입부동기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정말 가입 생각이 없었다. 과 동문 중에 한 명이 동아리를 알려주는데 그중에 미식축구가 있었다. 미식축구 선배들이 운동도 잘하고 사고도 많이 친다는 소문을 들었다. 소문을 듣고 입부하니깐 맞는 것도 있고 부풀려진 것도 있었다. 내가 결정적으로 입부하게 된 이유는 ‘술’과 ‘사람’이었다. 들어오기 전까지 입부서 작성하면서 ‘이게 맞나...’ 싶었다. 그런데 입부하고 한 번도 ‘나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재미있었다. 철도 없었다. (웃음) 공익을 가고 난 뒤에도 계속 시합은 들어갔었다. 옛날 18기, 19기에서 나를 이상하게 생각한 애들이 많았다. 술 먹을 때 엄청 이상(?)했다가 시합 때 되면 항상 나타났기 때문이다.  

 

Q2. 미식축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재미로선 합숙이 진짜 재밌었다. 1학년 때 동기 중에서 군대 갔다 와서 나간 동기가 있는데 걔가 말을 진짜 잘했다. 진짜 재밌는 친구였다. 전야제 할 때 걔가 사회를 보게 되었는데 난리가 났었다. 안 오려고 하는 사람들도 너무 재밌어서 나중엔 집에 안 갔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전야제 같은 거 하면 즉석 헌팅(?)을 해서 데리고 와서 놀기도 했었다. 그땐 우린 1학년이었을 때 여자한테 말 못 붙이는 애도 있었다. 그러면 매니저들이 대신 말 걸어주고 데려오기도 했었다. 하루는 비가 와서 밖에 사람이 별로 안 지나갈 때, 누가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어머니뻘 되는 분이었다. 그분이 와서 “여기는 뭐 하는데고?” 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시합은 이때까지 우승했던 것도 다 기억이 나지만 동의대랑 경기했을 때 첫 터치다운과 가장 최근에는 그리폰즈랑 시합하던 중에 아킬레스건을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터치다운을 했을 때이다. 그때 나이가 마흔 살쯤인가...... 그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아무래도 사람은 대부분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니깐 내가 터치다운을 했던 순간들은 다 떠오르는 거 같다. 우승했을 때도 정말 좋았고 에피소드도 정말 많은데, 또 기억이 남는 에피소드는 YB 시절 서울로 결승전을 갈 때 하필 부산에 잘 내리지도 않는 폭설이 왔었다. 그때 부산 MBC도 우리 촬영하러 왔었거든. 이제 서울 올라가야 하는데 그때는 KTX는 없던 시절이라 새마을호를 타고 가야 했다. 그런데 폭설로 인해 대거 지각 사태가 발생해서 기차를 놓치고 그 뒤에 무궁화호를 타게 되었다. 카메라맨 빼고는 MBC 사람들은 전부 먼저 갔다. 나중에 MBC에서 내가 인터뷰한 게 TV에 나와서 친구들한테 연락 많이 오고 그랬었다. 

 

Q3. ‘M’이란 별명가지고 계시잖아요. 어떻게 생기신건가요?

내가 술이 완전히 취하면 눈이 빨개진다. 94년도에 가장 유명했던 드라마 중 심은하가 나오는 ‘M'드라마에서 눈에서 레이저 나오는 모습이 나랑 닮아서 그때부터 별명이 M으로 된 것이다. 내 한 기수 밑에 별명이 발가락(16기 박동흠)이라는 친구가 있다. 엄지손가락이 발가락처럼 생긴 사람이 생겨서 별명이 발가락이 됐다. 대부분 별명에 큰 뜻이 있는 건 아니다. 

 

Q4. 미식축구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세 분이 생각나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정환진 감독님, 박창훈 감독님 그리고 호정이형이 생각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총 감독님은 운동을 되게 잘하셨던 분이셨고 운동을 그렇게 많이 시키시는 분은 아니었다. 적게 하지도 않았고 우리가 못하지도 않았지만 낭만, 꿈, 재미 등 이런 것들을 많이 가르쳐 주셨던 거 같다. 격려도 엄청 해주시고 항상 ‘경성대 미식축구부 최고다’ 이런 말씀도 아끼지 않으셨다. 어느 순간 사회에 나가도 면접을 보거나 할 때  이런 영향 덕분에 기가 확실히 안 죽었던 거 같다. 인생에 큰 도움이 된 거 같다. 그리고 미식축구를 정말 좋아하셨던 분이 박창훈 감독님, 호정이 형이다. 지금도 그런 것 같다. 내가 처음 들어간 이유도 호정이 형 덕분이었고, 그때 들어갔을 때 계셨던 분이 총 감독님이었다. 내가 포지션이 리시버이고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은 코너백이었다. 가장 재밌어했고 그것을 가르쳐주셨던 분이 박창훈 감독님이셨다. 1학년 1학기 때 가르쳐주셨던 내용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상대 가드의 다리를 보아라’ 이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Q5. 미식축구 3대 정신이 사회에 나갔을 때 장점이 되는 것 같다 하는 부분들이 있을까요?

미식축구를 하다 보면 착한 사람도 있고, 봉섭이처럼 재밌지만 속정 있는 애들도 있고 또 어떤 친구는 개그맨처럼 진짜 재밌는 친구도 있고 나의 동기 중에도 속마음은 따뜻한데 애들 잘 괴롭히는 애들도 있고 진짜 다양한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같은 목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어디 가든 경험하지 못 하는 일들이다. 사회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이다. 
미식축구를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생활을 못 하지는 않는다. 미식축구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독특하다. 내가 미식축구 했었던 이야기들을 직장동료나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 해주잖아? 그럼 거짓말이라고 한다. 진짜라고 믿는 사람 잘 없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있었다고?’ 되묻는다. 근데 우리는 진짜 있었던 일들이다. 그래도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잘 살아가는 것 중 그 안에는 사실은 미식축구 3대 정신 ‘희생 봉사 개척’ 뭐 그런 것들도 있지만 우정, 사랑이란 것도 존재하기 때문에 미식축구가 인생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됐다.

 

Q6. 경기대 미식축구부 창립 하셨다가 지금은 없어졌잖아요.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해주실 수 있나요?

2003~4년에 7기 강윤승 형이랑 같이했었다. 그때 둘 다 서울에서 살았었다. 원래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있던 친구가 경기도에 학교에 가면서 경기대에 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 안병훈도 서울에 올라와 있어서 윤승이 형이 나랑 병훈이한테 ‘코치 좀 맡아주면 안 되겠나?’ 라고 해서 1년 동안 열심히 했었다. 그래도 팀 창단한 팀 중에서 가장 최단 시간으로 우승했던 것 같다.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지만 옛날에 박창훈 감독님이 ‘네가 부산에 있으면 다른 애들 가르치는 것같이 했으면 어떻겠냐’라고 권유받은 적도 있었다. 뭐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을 때, 사실은 운동했던 사람들은 다 그런 꿈들이 있는 것 같다. ‘가르치고 싶다’ 뭐 이런 꿈들. 갑자기 이 질문을 물어보니까 그때 생각이 났다. 항상 아쉬운 부분이다. 못했던 것들 내가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했으면 기회가 있을 수도 있고, 그런데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는 그다음 문제였던 것 같다. 내가 뭐 코칭스텝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사람은 항상 자기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듯이 그런 것들이 좀 남아있었던 것 같다.

 

Q7. YB들한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사실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조금 힘들 수는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미식축구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틀 안에서 많이 움직여 그리고 그 안에 있고 싶어 하고. 인간은 항상 대중 무리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해한다. 미식축구를 처음 오고 금방 그만두는 사람들은 운동이 힘들기도 하고 독특한 사람, 깐깐한 선배들도 많으니 불편하고 말이 안되는 게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어려운 순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스펙트럼이 어느 순간 넓어진다. 좁았을 때, 내 역량을 발휘하는 게 작지만 넓어지는 순간에는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 사실은 YB들은 고민이 되게 많을 것이다. ‘그만해야 되지 않나’. 조금만 더 참고 본인 장점을 더 들여다본다면 내가 미식축구에서 받아 갈 수 있는 게 더 많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미식축구는 일반 사람들이 견디기에 만만치 않은 운동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