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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석진우 컬럼

석진우 컬럼 _ 우리는 승리를 위해 어디까지 내려가야 할까? - gamesmanship의 한계

by HUEMONEY 2020. 10. 5.

중학교 때부터 이미 덩치가 크고 팔씨름에 적수가 없었던 필자가 고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되어 처음 본 친구와 씨름을 하게 되었다. 같은 중학교 출신이 아니어서 서로를 잘 몰랐다. 샅바를 잡고서 그녀석이랑 겨뤘는데 나는 매번 모래판에 먼저 나가 떨어졌다. 나는 동네씨름 수준이었고 그 친구는 씨름을 정식으로 배웠던 거다. 6~7판 정도를 계속해서 지니까 은근 화가 났지만 실력 차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붙었는데 점심시간 끝나는 종이 울렸다. 마지막 판이겠구나 싶어서 강하게 안다리 기술을 넣었는데 아주 손쉽게 그 친구를 넘겼다. 순간 느낌이 왔다. “이 녀석 계속 내가 지니까 마지막 판이라고 일부러 넘어져 줬구나!‘. 진 것 보다 더 기분이 나빴다. 교실로 올라가면서 그 친구에게 ”다음에도 그러면 나한테 죽어“ 하고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몇 년전 해외토픽에 미국의 고등학교 여자농구대회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전력 차이가 크게 나는 두 팀이 경기를 했는데 결과는 106대2. 이 경기가 끝나고 승리팀의 감독은 지역리그 협회로부터 2경기 출장 정지처분을 받았다. 이에 사람들 사이에서 경기와 관련하여 갑론을박 했다는 기사내용이다. 지나치게 큰 점수차이로 이긴 것은 스포츠맨십에 어긋난다는 입장과 매 경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스포츠맨십이며 적당히 하는 것이 상대를 오히려 모욕하는 것이라는 입장으로 나뉘었다.

누가 옳은 것인가? 나에게 마지막판 배려를 한 고등학교 친구가 옳은 것인가, 아니면 경기가 끝날 때까지 100점 이상 점수를 넣은 미국 여자고등학교 팀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이런 상황이 옳고 그름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친구랑 간단한 내기를 해도 이겨야 한다. 하물며 1년 내내 땀 흘린 결과를 시합에 모두 쏟아 붇는 선수와 감독에게 승리는 유일한 목표이며 이유이다. 그래서 우승을 하면 그 동안의 노력이 생각나서 그 큰 덩치의 선수들이 펑펑 운다. 이 글을 읽는 미식축구 식구들은 승리를 위해서, 우승을 위해서 어떤 것까지 해 봤는가? 수백 수천번의 반복훈련? 가족 결혼식조차 뒤로하고 오직 훈련했던 기억들? 골절인데도 경기가 끝날 때까지 모르고 뛰었던 집중력? 아니면 전술분석을 위해서 상대방의 모든 예선 동영상을 모조리 외워버린 시간들? 


요즘 넷플렉스에서 인기 있는 마이클 조던 다큐멘터리 the last dance가 방영중이다. 경쟁심이라면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역대 세계 최고가 아닐까 싶은 선수가 바로 마이클 조던이다. 선수시절 승리를 위해 그가 했던 언행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워싱턴의 라브래드포드 스미스와의 일전. 첫 만남에서 마이클 조던은 그 답지 않게 완전히 이 신인선수에게 완패하고 만다. 다음날 2차전에서 마이클 조던은 라커룸에서 팀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라브래드포드 스미스가 시합 후에 자기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고. (조던이 주장한 내용은 ‘Nice game, Mike’였다고 함)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다음날 워싱턴과의 2차전에서 마이클 조던은 전반에만 36점을 넣으며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라브래드포드 스미스는 마이클 조던에게 그런 이야기 조차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없는 이야기까지 만들어 동기부여를 하는 마이클 조던, 이쯤 되면 무섭다. gamesmanship의 끝판왕이라고나 할까? 

예전에 국내 모 일간지에서 전날 프로야구에서 승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팀간 난투극이 있었던 것을 언급한 기사가 있었다. 해당 기자는 뜬금없이 빈스 롬바르디의 명언 “Winning isn't everything"을 인용하면서 스포츠맨십을 강조했다. 롬바르디는 명언 제조기란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말이 많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말은 Winning isn't everything; it's the only thing. 해당기자는 바로 이어서 나오는 문장은 아마 몰랐던 것 같다. 두 문장을 연결하면 롬바르디의 말은 스포츠맨십을 강조한 것이 아니고 승리에 대한 무서운 집념의 표현이다. (일부 기록에서는 Winning isn't everything, but making the effort to win is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필자는 십여 년 전 타지역 리그 대학미식축구 예선 경기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후반전 2분여가 남았고 50점 이상 이기고 있던 팀이 다시 터치다운을 해서 킥오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킥오프 팀이 갑자기 on side kick을 차고 다시 공격권을 확보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옆에 있던 지인에게 굳이 저럴 필요가 있냐고 물었더니 아마 짐작컨대 승리팀 입장에선 내년에 다시 경기할 때 오늘 강한 이미지를 심어줘야 자신들이 심리적으로 전략적으로 유리할 거라는 판단이었을 거라는 의견을 이야기했었다.

MLB의 전설인 타이 콥(Ty Cobb)이란 선수의 gamesmanship은 상상을 불허한다. 이 선수가 2루로 도루할 때 수비수를 위협하기 위해 운동화 클리츠를 날카롭게 갈았다고 한다. NFL 등번호 56번의 전설 뉴욕 자이언츠의 라인베커 로렌스 테일러. 흔히들 LT로 더 유명한 이 선수는 현역시절 같은 팀 동료들과 함께 곧 있을 상대편 선수를 부상 입히는 것을 내기했다고 한다. 실제로 고의 여부를 떠나서 Redskins의 QB 조 타이즈먼을 sack하면서 다리를 골절시켜 다시는 운동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모든 선수들, 모든 코칭 스탭은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최선 안에는 말 그대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다는 의미이다. 결승전에서 맞붙는 상대와의 실력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경기규칙의 허점을 잘 이용한 것이든, 상대의 전략을 잘 분석한 것이든,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서 결국 승리를 거머쥔 것이든 비난의 대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이 오는 경우가 있다. 100점 이상 지고 있는 상대에게 all court pressing 전술을 쓸 필요가 있는 건지, 50점 이상 차이가 나는 상대팀에게 굳이 마지막 on side kick을 찰 필요가 있는 것인지, 날카로운 클리츠로 상대를 다치게 해서 얻은 도루 성공이 값진 기록인지 스스로 묻게 된다.

우리는 왜 스포츠에 열광하고 집중하고 승리자에게 존경을 표현할까? 팬들은 순수하게 승리했을 거라는 즉, 결과와 과정 모두 정당한 절차를 거쳤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MLB 2017년 월드 챔피언인 휴스턴 아스트로스는 우승 과정에서 사인 훔치기가 발각되어 모든 명예를 반납해야 할 지경에 와 있다. 팬들의 마음속에서 휴스턴은 더 이상 챔피언이 아닌 것이다.

자신의 도를 넘은 승부욕 때문에 상대가 심각한 부상을 당하거나, 비참하게 구겨진 자존감에 팀을 떠나거나, 승리에만 집착한 나머지 불법적인 행위를 감행하여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해선 안된다. 럭비의 전통처럼 패배한 팀이 줄맞춰 서서 승리한 팀이 퇴장할 때 기꺼이 박수를 보내는게 힘들다면 적어도 이긴 팀과 진 팀이 다음에도 다시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해 시합할 수 있는 상황이 계속된다는 것 정도는 해야 되지 않을까? gamesmanship의 하한선은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